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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시집 리뷰 - 라이너 마리아 릴케

 

 

첫 시집

초기 시집

시도서

형상 시집

20세기 독일의 뛰어난 서정 시인 중 한 명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집. 그의 초기 시들을 엮은 책이다. 얼마전에 감상했던 영화 '조조래빗' 에서 그의 시들이 인용되어 당연히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냉큼 구입한 책이었으나 의외로 이 책엔 조조래빗에 나왔던 시가 없어, 후기 시집도 사서 읽어야 하나 고민중이다.

개인적으로 릴케는 전혀 몰랐다. 여태껏 그의 존재도 몰랐으며 조조래빗을 보고 처음 알게된 시인이다. 독일의 시인이었고 로뎅의 비서로 일하면서 지극히도 많은 자극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했다고 한다. 열 아홉의 나이에 첫 시집을 발표하고 51세에 백혈병으로 죽을때 까지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운율의 시를 발표했다고 한다. 전혀 모르던 시인의, 그것도 초기 시집이 뭉뚱그려져 있는 시집을 읽는다는 건 상당히 고된 책읽기였다. 애초에 시는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투로 적혀있는 작품들이 대부분이라 상당부분 공감하기 힘든 시들이 잔뜩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극찬을 받는 릴케의 시들은 그럭저럭 내 마음에 꽤 와닿았다. 시에 대해 문외한인 나같은 사람이 읽어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작품들도 여럿 있었고 무슨 말인지 정말 1도 이해가 안되는 이야기들도 퍽 많았다. 그중에서 원어가 대체 어떤 문장이고 한국어로 풀어내면 어떤 뜻인가 궁금할 정도로 처음보는 한글 단어를 사용해 해석을 해낸, 역자 송영택의 국어실력에 갸우뚱거리면서도 호기심이 일어나는 문장들이 꽤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우듬지(나무의 꼭대기 줄기)', '융숭하다(대우하는 태도가 정중하고 극진하다)', '깔쭉깔쭉(깔끄럽고 거칠게 따끔거리는 느낌)', '아마포(린넨 섬유)', '유원하다(심오하여 아득하다)', '시새우다(자기보다 잘되거나 나은 사람을 공연히 미워하고 싫어하다)' 등 난생처음보는 한국어들로 인해 안그래도 어려운 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사전을 찾아가면서 봐야하는 시집이라니!). 그래도 처음 경험하는 일이라 나쁘진 않았지만 단순명료할 줄로만 알았던 시도 이렇게 심오하고 어려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릴케의 초기 시집이다. 과연 릴케의 후기 시집도 읽어야 릴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여전히 생각하고 있다. 릴케 시집을 단숨에 끝까지 읽어냈지만(거의 이틀만에) 내가 제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는 0.5%도 안되는 듯 하다. 첫 시집 보다는 조금 더 다듬어져 있는 형상 시집 쪽이 내 스타일이었다.


 

 

참으로 슬프기만 하다,

세상이 온통 잿빛으로 잠겨 드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키스하고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는 것처럼.

어느 언덕 위에서 어느 소녀가

마지막 남아 있는 시든 장미를 몰래 내게서 훔쳐 갔기에

내가 죽어 누워 있는데, 머릿속에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솟아나듯이.

참으로 슬프기만 하다 31p

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내가 너에게 사과를 주었던 일을.

그리고 너의 금빛 머리카락을 살며시 예쁘게 빗겨 준 일을.

너는 알고 있을까. 그것은 아직도 내가 잘 웃던 때였던 것을.

그리고 너는 아직도 철없는 어린아이였던 것을.

어느덧 나는 웃지 않게 되었다.

내 가슴속에 젊은 희망과 묵은 슬픔이 불타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여선생이

너에게서 <베르테르>를 빼았던 무렵이었다.

봄이 부르고 있었다. 나는 네 뺨에 입맞춤을 했다.

네 눈은 크게 기쁨에 넘쳐 나를 쳐다보았다.

일요일이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울리고

숲 사이로 햇빛이 새어 내리고 있었다......

너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36p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언제였던가 너를 본 적이 있다.

지금 우리는 가을날을 함께 걷고 있다.

그리고 너는 내 손을 잡고 흐느끼고 있다.

흘러가는 구름을 울고 있는가.

핏빛처럼 붉은 나뭇잎 때문인가. 그렇지 않으리.

언젠가 한번 행복했기 때문이리라.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어느 봄날에선가 꿈에선가 41p

나의 신성한 고독이여,

잠 깬 정원처럼

너는 풍요롭고 맑고 넓다.

나의 신성한 고독이여,

그 앞에서 갖가지 소망이 기다리고 있는

황금의 문들을 굳게 잠가 두렴.

나의 신성한 고독이여 43p

동경이란, 출렁이는 물결 속에 살며

시간 속에 고향을 갖지 않는 것.

소망이라는 것은 나날의 시간이

영원과 속삭이는 나직한 대화.

산다는 것은, 시간 중에서 가장 고독한 시간이

하나의 어제에서 떨어져 나와

다른 시간과는 다른 미소로

영원한 것을 말없이 마주할 때까지.

동경이란 63p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인생은 축제일 같은 것이다.

하루하루를 일어나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길을 걷는 어린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실려 오는

많은 꽃잎을 개의치 않듯이.

어린아이는 꽃잎을 주워서

모아 둘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머무르고 싶어 하는데도

머리카락에 앉은 꽃잎을 가볍게 털어버린다.

그러고는 앳된 나이의

새로운 꽃잎에 손을 내민다.

인생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68p

소중한 목숨을 내던질 만큼

그렇게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은 없을까.

나를 위하여 누군가 바다에 빠져 죽으면

나는 돌에서 해방되어

생명으로, 생명으로 되살아난다.

나는 끓어오르는 피를 이렇게도 간절히 바란다.

그러나 돌은 너무나 조용하다.

나는 생명을 꿈꾼다. 산다는 것은 즐거운 것이다.

나를 잠 깨울 수 있을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는가.

그러나 언젠가 내가

나에게 더없이 아름다운 것을 주는 생명을 가지게 되면

그때 나는 혼자 울게 되리라.

나의 돌을 그리며 울게 되리라.

나의 피가 포도주처럼 익는다 해도 무슨 소용 있으랴.

나를 가장 사랑해 주던 사람을

바닷속에서 되돌아오게 할 수도 없는 것을.

석상의 노래 184p

고독은 비와 같다.

저녁을 향해 바다에서 올라와

멀리 떨어진 평야에서

언제나 적적한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비로소 도시 위에 떨어진다.

밤도 낮도 아닌 박명에 비는 내린다.

모든 골목이 아침으로 향할 때,

아무것도 찾지 못한 육체와 육체가

실망하고 슬프게 헤어져 갈 때,

그리고 시새우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침대에서 잠자야 할 때,

그때 고독은 강물 되어 흐른다......

고독 202p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하늘의 먼 정원들이 시들어 버린 듯이.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다른 별들에서 떨어져 고독에 잠긴다.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두 손에 받아들인다.

가을 206p

죽음은 크고도 넓다.

우리는

웃고 있는 그의 입.

우리가 삶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때

그는 우리의 한가운데서

굳이 울기 시작한다.

끝맺는 시 238p

 

 

릴케 시집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