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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eek 1 movie

영화 행복한 라짜로 후기

 

 

저들은 개 돼지야. 조금만 풀어주면 자신들이 노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걸. 그래서 쉬지 않고 부려먹는 거야.

 

 

저들은 뭐든 다 무서워해.


 

라짜로의 행복은 어디있나요.

이탈리아 시골마을 인비올라타.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후작 부인인 데 루나 밑에서 일을 한다. 담배 농장에서 하루 종일 고된 노동을 하며, 전구도 없는 궁핍한 생활환경에서 생활하는 라짜로와 마을 사람들. 어느날 후작 부인이 아들 '탄 크레디(루카 치코바니)' 를 데려오는데, 입이 무거운 라짜로와 은근히 죽이 맞는다. 그러던 어느날 탄 크레디가 실종되면서 인비올라타에서 지내는 모든 마을 사람들의 운명이 바뀐다는 이야기.

이 영화는 순전히 낚여서 본 영화다. 네이버 영화 정보란에 '김형석' 이라는 영화 저널리스트 양반이 '신약성서', '우리 시대의 예수' 운운하며 영화 행복한 라짜로를 극찬했는데(심지어 짜디 짠 별점을 주는 박평식 영화 평론가도 이 영화에 별점 7점을 줬다 - 박평식의 7점은 만점이라는 의미다 -),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알겠지만 과연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인지 의구심이 든다.

모든 예술영화들이 그렇듯, 상업영화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란 여간 어려운게 아니다. 그래서 국내의 여러 예술 영화 전용 상영관들이 앞다투어 해외의 여러 영화제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영화들을 먼저 상영하려 힘을 쓰고, CGV 같은 공룡기업 멀티플렉스에서도 'cgv 아트 하우스' 같은 예술 영화 전용관을 따로 만들어, 예술적 가치가 높은 영화들을 상영한다.

하지만 과연 예술 영화를 구분짓는 잣대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행복한 라짜로를 보고 들었다. 수십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상업 영화에 비해 소소하고 몇 푼 안되는 돈으로 어렵게 만든다고 다 예술 영화가 되는 건 아니다. 또한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 것만이 예술 영화는 아니다. 아마추어가 찍은 듯한 카메라 워크, 16mm 필름으로 찍어서 보는 재미(??) 를 더했다고 예술 영화가 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비단 본작 뿐만이 아니라 여러 '예술 영화' 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저예산 영화들 대부분이 그렇다. 뻔한 상업 영화가 아닌, 예술 영화에서 받을 수 있는 어떤 '인간적인' 감동이라던가 확실히 가슴에 꽂히는 명징한 주제 따위가 예술 영화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두루뭉술한 표현력과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속성에 기대어 '이건 예술 영화랍니다' 라고 말해봤자 흥행이고 뭐고 평생 그런 영화나 만들라지... 한 마디로 재미가 없다 이 영화는.

아무튼 영화 행복한 라짜로도 그런 영화들에 속하는 예술 영화다. 예수님처럼 죽었다 살아난 '나사로' 를 떠올리면 쉬울 듯. 무보수로 후작 부인에게 쉴새없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인비올라타의 마을 사람들에게 라짜로는 더 착취를 당한다. 매일 마을 사람들은 라짜로만 부르기 일쑤고 맘 편히 쉴 만한 시간도 쥐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라짜로는 혼자만의 공간을 산 꼭대기에 마련해 두는데, 어느날 마을을 찾아온 탄 크레디가 그런 라짜로와 잘 어울리게 된다. 라짜로가 몰래 만들어 놓은 아지트에서 며칠이고 밤을 보내고 엄마인 후작 부인에겐 납치 당했다며 몸 값을 요구하는 협박 편지를 쓴다.

그 와중에 라짜로는 탄 크레디에게 받은 새총을 뒷주머니에 꽂은 채,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게된다(갑자기!). 평소 탄 크레디를 흠모하던 어린 소녀는 아들의 장난질에 분개하던 후작 부인 대신 경찰에 탄 크레디의 실종 신고를 내고, 그 바람에 경찰이 인비올라타에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던 후작 부인을 검거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날 라짜로가 늑대와 보름달의 힘으로(...) 눈을 뜨고, 마을을 내려가 보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미 모두 떠난 상태.

라짜로는 무작정 길을 걷던 와중에 후작 부인의 저택을 털던 도둑들을 만나면서 도시로 이주한 마을 사람들과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라짜로가 죽어있는 사이 시간은 2~30년이나 흐른 뒤였다.

꼬마아이였던 피포는 여자를 좋아하는 청년이 되어 있었고 그의 엄마인 안토니아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남자를 만나,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며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새로운 세계에 와서도 라짜로는 별 말 없이 그들을 돕는다. 마을 사람들의 범죄를 돕거나 지하철 인근의 불법 시설물에서 나는 나물들을 캐거나. 모두가 하나였던 인비올라타의 마을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의 안위만 챙기기 급급한 이기적인 집단이 되어버렸고 오직 라짜로만 그대로였다(외모나 나이나 마음씨나). 탄 크레디가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를 우연히 발견한 라짜로는 결국 성인이 되어 폭삭 망해버린 탄 크레디와 재회하게 되고 그가 줬던 '무기' 인 새총 덕분에 탄 크레디를 가난으로 몰고간 '은행' 에서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아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행복한 라짜로는 '행복' 과 '결핍', '삶의 질', '마음씨', '공동체' 따위를 꾸준히 보여준다. 그 속에 (죽음에서 부활하며)이솝우화 처럼 서있는 라짜로가 있는데, 굉장히 어설픈 장치로 관객의 어리를 둥절하게 만든다. 명확히 캐치할 수 있는 주제를 어느정도는 관객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뜬금없는 '음악이 우리를 따라왔다' 라는 대사나 라짜로를 살릴 때 나타났다가 라짜로가 죽은 다음에 홀로 도심을 거니는 늑대 등 감독 혼자만 알법한 소재들로 자위하는 영화다.

늘 이런류의 예술 영화를 보면 드는 생각이지만 관객이 알아먹기 어렵게 만든 이런 허접한 영화를 '예술' 이랍시고 무작정 빨아대는 평론가나 관객들을 보면 그냥 그네들끼리 영문도 모를 영화 만들어서 보고 평론하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마치 '신' 처럼 표현되는 라짜로의 절벽 씬 이후의 삶과 '선함',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 을 표현하기엔 영화 플롯을 너무 심각할 정도로 엉성하게 지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