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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eek 1 movie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리뷰

- 근데 오늘 우리집에서 자고 갈거예요?

- 그럼요.

- 근데 이름이 뭐라그랬죠? 나 십 년만에 남자 처음 안아봐요. 더 꼭 안아줘요.

- 누구세요?

- 저는 장국영이라고 합니다.

찬실씨, 영화 안 하고도 살 수 있을거 같아요?

나는 오늘 하고싶은 일만 하면서 살어. 대신 애써서 해.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젊었을 땐 늘 목이 말랐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은 나를 채워줄 것만 같았어요. 하지만 채워도 채워도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목이 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이 아니에요.

사는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우리가 믿고 싶은 거, 하고 싶은 거, 보고 싶은 거.

 

 

 


 

 

우리네 인생에게 슬그머니 건네는 어설픈 위로.

 

영화 프로듀서 '이찬실(강말금)'은 어느날 갑자기 감독의 죽음으로 인해 준비하던 영화도 엎어지고 집도 이사하고 한 순간에 백수가 되어버린다. 나이가 40인데. 급한대로 친한 여배우 '소피(윤승아)'네 집에 가사도우미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10년동안 몸담았던 예술영화판에서 쫓겨나며 하루아침에 이도저도 아닌 인간이 된 찬실은 소피의 불어 과외선생인 '김영(배유람)'에게 한 눈에 반하게 되고 그녀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예술영화 감독 영은 찬실을 나이 많은 누나 그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보지 않는다. 젊은 청춘을 영화에 바쳐가며 평생 연애 한 번 못해본 찬실의 어설픈 연애질이 연하남에게 통할리 만무. 그러던 어느날 찬실이 가장 사랑했다는 홍콩배우, '장국영(김영민)'이 귀신으로 나타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그녀를 어설프게나마 위로해주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밀어주고 살며시 다독여준다. 나이 40에 비로소 '인생' 을 살기로 결심한다는 찬실이의 이야기.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박복한 중년 여성의 삶을 이야기한다. 본작의 연출과 시나리오를 맡은 김초희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프로듀서로 활동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이 영화에 꽤 많이 투영시켰다. 돈도 안되는 예술영화의 PD로 있으면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커리어를 제작사 대표로부터 하루아침에 제거당한 찬실은 '이참에 연애나 해볼까' 라는 요상한 생각과 더불어 평생 몸담아왔던 영화판을 떠나는게 맞는건지, 자신이 행복해지려면 무얼해야하는지,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에 고민을 하며 시간을 보낸다.

사회생활이라곤 오직 술뿐이었던 영화 프로듀서가 영화계에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지 영화를 25년동안이나 지극히도 좋아했던 나도 잘 모른다(찬실이는 복도 많지에서 배우들의 스케쥴을 맞추거나 돈을 관리하거나 온갖 잡다한 일을 한다고 찬실이가 대답해준다). 나름 '영화인'이라고 자부하며 살던 30대의 10년을 보내고 40대에 들어서자 그 길이 사라져버린 기분은 과연 어떨까. 게다가 돈도 별로 되지않는 예술 영화판에서의 pd라면?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든게 엉켜있는 머리를 뒤로 두고 찬실이는 일단 당장 눈 앞의 인생을 살아간다. 연하남도 꼬셔보고 한참이나 어린 여배우의 집을 청소하기도 하고 한글을 잘 못 쓰는 자신의 단칸방 집주인 할머니(윤여정)의 한글공부도 도와주면서. 거기에 유독 튀는 인물이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2003년 4월 1일, 만우절의 거짓말 처럼 죽은 장국영이다. 찬실이가 좋아했다는 장국영이 귀신의 모습으로 오직 찬실이의 눈에만 보이는 매개체로 등장한다. 물론 '아비정전(1990)'에서 맘보를 추던 런닝셔츠와 트렁크만 입은 그 모습 그대로.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등장한 장국영은 주인공 찬실이가 한국인이라 당연히 한국말도 잘 한다(딱 한 번 중국말도 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 누구도 찬실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는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여배우 소피는 찬실이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주려고만 하고 과거 예술영화 감독이었지만 현재는 불어 강사인 김영은 찬실이의 옆에서 말 그대로 '있어주기만 할 뿐', 외로움을 달래는 것이 사랑은 아님을 찬실이에게 몸소 깨닫게 해준다. 그 때 뜬금없이 나타난 장국영의 존재는, 찬실이 스스로가 만들어낸 일종의 자기방어기제가 아닐까 생각된다. 조언을 듣기엔 나이가 너무 많고 뭔가 새로운 걸 도전하기에도 힘이 든 찬실의 인생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나이에 접어든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기 스스로 일어서야한다. 죽이되든 밥이되든 일단 일어 서는게 먼저다. 찬실이는 장국영이 등을 슬쩍 떠민 덕에, 그래도 영화판에서 더 굴러보기로 마음먹고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찬실이의 시나리오가 끔찍할 정도로 지루하다는 게 큰 함정이지만...

찬실이는 복도 많지 결말에 도달해도 찬실이가 뭔가를 이뤄낸다거나 현실을 타계할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아니다. 찬실이는 그저 묵묵하게 앞에 걸어가는 사람들이 넘어지지 않게, 휘영청 밝은 달이 뜬 밤에 뒤에서 그들을 손전등 하나로 비춰준다. 마치 그녀가 10년동안 영화속에서 잡다한 모든 일들을 해왔던 그 때 처럼. 이런 엔딩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라 마음에 와닿는 영화 되시겠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어설픈 코미디와 정제된 위트, 그리고 영화속 김영이 '별다른 사건이 없어서 좋아하지 않는다' 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동경 이야기(1953)'처럼 별다른 대안을 보여주지 않은채 끝이나지만 앞서 서술됐던 모든 이야기의 함축적 의미를 담은 결말부분에 쓰인 몇 문장의 대사들을 나열하며 왜 우리가 이 영화를 봐야하는지 알려주는 그런 영화다.

현실에선 누구도 기댈 사람 하나 없고 어디에도 지친 몸과 마음을 둘 곳이 없으니 한국말을 하는 귀신, 장국영에게나마 위로를 받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야한다. 섣부른 위로나 젠체하며 훈계를 하지 않아서 더 따스한 영화였다. 무슨 꿈이던, 젊은 시절에 꿈을 꾸었고 그 꿈이 현실에 부딪혀 몇 차례나 꺾임을 경험했던 이들에겐 아주 좋은 위로의 영화이다.

찬실이가 세들어 살던 단칸방 집의 주인 할머니의 한글 솜씨와 장국영의 어설프지만 포근한 위로가 마음에 깊이 남는 영화다. 머나먼 우주에서 응원을 해주겠다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 할수가 없잖아?!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ost는 판소리계의 이단아 이희문과 장기하와 얼굴들의 베이시스트였던 정중엽이 참여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들려온다.

상당히 중독성이 강한 이희문의 목소리 덕분에 사운드 트랙을 찾아봤는데 아직 제작사에서 풀지 않은 모양.

++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상영관은 현재 롯데 시네마와 메가박스, 그리고 규모가 작은 예술 영화관에서 상영하고 있다. 나는 당연히 cgv 아트하우스에서 관람했음. 네이버에서 '찬실이는 복도 많지 상영관' 으로 검색하면 극장을 쉽게 찾고 예매 할 수 있다. cgv는 네이버랑 친하지 않은지, cgv 어플이나 홈페이지에서만 상영정보가 뜬다. 참고 하시길.